<만들기와 그리기> 제1회 개인전
<만들기와 그리기> 제1회 개인전
- 주소 (63270)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동광로 69 문예회관 제3전시실
- N/A https://www.youtube.com/watch?v=8gPXngkoI3g
만들기와 그리기
어릴 적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하였다. 물론 공부하기도 좋아하였다. 광주에서 살던 시절 어머니와 함께 모자(母子)사생(寫生)대회에서 그림을 그렸던 생각이 난다. 동상(銅像)들이 있는 공원이었다. 금색(金色), 은색(銀色) 크레파스 칠을 했던 기억이 난다. 주변에 있는 참가 학생들의 그림도 보았다. 저렇게도 그리는 구나. 내가 본 것은 현실의 자연이 아닌 그리는 자의 자연(自然)이었다. 집에서는 교과서에 나온 칼라 삽화(揷畫)를 따라 그렸던 생각이 난다.
미대 진학(進學)을 결정한 것은 피카소의 죽음 때문이었다. 참 웃기는 일이다. 연일 신문에 기사가 실렸었다. 영문학(英文學)과 미술(美術)의 길을 저울질하던 나는 화가(畫家)가 참으로 위대(偉大)하게 보였다.
미대(美大) 시절 입체(立體) 만드는 것을 처음 해보았다. 그리기에 회의(懷疑)가 들던 시절이었다.
고향으로 내려와서 인체(人體) 만들기를 참으로 열심히 하였다. 모델을 구할 수가 없어 해부학(解剖學) 책과 사진(寫眞)을 보면서 만들었다. 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뜯어 버리고 다시 만들었다. 같은 형태(形態) 만들기를 지칠 때까지 하였다. 그 당시는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었다. 마음과 몸이 초(初)주검이 되어서 작업실을 나왔다. 그 결과(結果)물이 인체연습(a study on human body)이다. 너무 어려웠다.
쉴 겸 추상(抽象) 작업도 하였다. 미대 재학시 영국의 프라이머리 스트럭쳐(primary structure)가 인상 깊었다. 인체연습(a study on human body)과는 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 결과물이 형상연습(a study on figuration)이다. 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인체 만들기였다. 모델이 없이 해부학 지식으로 하는 작업은 할수록 메마른 샘이 되어갔다.
그때 생각한 것이 그림그리기였다. 퇴직후 3년여 동안 열심히 그렸다. 40여점이 나왔다. 그 결과물이 화북풍경, 주변인물, 나무, 숲, 바다 그림들이다.
사진을 보면서 그린다. 다른 이유는 없다. 현장에서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의 구조, 색채를 더 잘, 그리고 더 오랫동안 관찰할 수 있었다. 현장의 짧은 시간에 본 인상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자연의 구조와 색채를 잘 파악할 수 있었다. 리얼리티(reality)라고나 할까. 우리말로 실재(實在)라고 하면 될까. 무엇이든 좋다. 그것은 자연(自然)이다. 나도 그것의 일부(一部)이며 내가 보는 모든 것이 자연이 아닌가? 사람의 마음과 생각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실재(實在)이다. 아직 그것은 그려 보지 못하였다. 언젠가는 그릴 수 있지않을까?
자연의 구조(構造)는 나를 매혹(魅惑)시킨다. 선(線)으로 혹은 면(面)으로 혹은 색(色)으로 화면(畫面) 위에 있다. 선의 구부러짐, 선의 강약, 마치 피아노 연주가가 침묵(沈默)의 한 가운데서 하나의 음(音)을 때리듯 짧고 강한 선을 화면에 긋는다. 그 것은 그 주변(周邊) 공간(空間)을 제어(制御)한다. 그 선과 주변 공간이 모여서 하나의 화면을 이룬다.
출품하지 못한 작품 중에 한라산과 산방산, 형제섬, 그리고 가파도(加波島)의 파도(波濤)를 그린 것이 있다.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衝擊)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크기의 원근(遠近)을 무시(無視)하고 그렸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앞으로 원근을 무시한 풍경도 그려보고 싶다.
가파도에 갔을 때 목조 건물과 그 앞에 가꾸어진 꽃밭이 있었다. 목조 건물은 눈높이에서 본 것을, 꽃밭은 위에서 내려다 본 것을 한 화면에 그려보고 싶었다. 아직 그리지 못하였다. 복수(複數) 시점(視點)에서 본 풍경을 그려볼 것이다.
원하는 것과 결과물의 차이를 실감하였다. 재료의 성질, 붓질의 성격 등 공부할 것이 많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다. 자부심과 함께 나를 채찍질할 것이다.
2020년 3월


